비전학기로 꿈을 찾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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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치료학과 19학번 이경민 학생 인터뷰


차 러브레터에서는 비전학기로 세계 인재에 도전한 미술치료학과 19학번 이경민 학생을 만나보았다.

Q1.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미술치료학과 19학번 이경민입니다. 작년 2020년 2월 13일부터 2021년 1월 8일까지 비전학기로 우간다를 다녀왔습니다.

Q2. 어떻게 우간다로 비전학기를 다녀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어렸을 때 막연한 로망 중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대외활동, 공모전을 찾아보다가 마침 그런 포스터가 있더라고요. 해외봉사단 모집 포스터가 있었는데 그게 기간도 딱 1년이고 저에게 잘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지원했어요. 그리고 최종 봉사단으로 선발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나라를 선택할 때 제가 1년 동안 살 건데 어디를 가도 관광지 같고 어딜 봐도 예쁘고 좀 로망 있는 나라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 나라는 나중에 제가 여행으로도 갈 수가 있을 것 같았어요. 이왕 해외 봉사 가는 거 힘든 나라로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프리카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간다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Q3. 비전학기로 가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사실 비전학기 제도라는 것은 저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제 로망을 이뤄보고 싶은 마음에 결정한 해외봉사였지만 1년이라는 시간을 비우고 떠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어요. 1년이 사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잖아요. 너무 떠나고 싶기도 했지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구들은 열심히 전공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공모전이나 대외활동 같은 것들로 알차게 살 텐데, 괜히 내 손으로 다 내려놓는 것 같고 해서 주저하는 마음이 컸어요.
교수님과 휴학 상담을 하러 갔는데 교수님께서 이 비전학기 제도를 추천해 주셨어요. 일단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 덕에 저의 막연했던 불안감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었고요. 그래서 비전학기 세계 인재 도전 유형의 학생으로 신청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Q4. 아프리카 중에서도 우간다로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우간다를 가게 된 것도 우간다의 기후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죠. 아프리카가 사실 우리 생각만큼 낙후되지 않았어요. 주변 봉사단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전 기수에서는 우간다가 활동 스케일이 제일 컸어요. 협약도 많이 맺어서 대학교에 강연도 많이 나가고 기업들과 인성 마인드 교육도 나가고 다양한 활동을 했었어요. 그래서 봉사활동도 좋고 나라도 좋으면 우간다로 가자 생각이 들었어요.
케냐는 아프리카 중에서 선진국이고 잘사는 나라에요. 케냐는 생각보다 아프리카 느낌이 안 나는 거 같았어요. 반면에 부론디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힘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간다는 약간의 아프리카다움과 도시다움이 있어서 분위기가 매력적이고 날씨도 좋다고 해서 우간다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Q5. 우간다에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우간다에 다녀온 이후로 변화된 게 있다면?

A. 저는 되게 뭔가 행복에 가치나 기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요. 원래 저는 염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측면이 있어서 “돈이 있으면 행복하지만, 행복하려면 돈이 꼭 필요하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사실 동의를 못 했어요. 우간다에서 지내면서 나랑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보고 하면서 제 기준이 바뀌게 된 거 같아요. 내가 나는 진짜 거기 있는 친구들 아기들 할머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순수하더라고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도 그 역치가 낮은 거예요. 그래서 똑같이 있어도 저는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골 학교에 갔을 때도 연예인이 온 것처럼 엄청나게 행복해하고 우리가 교육 봉사를 해도 한국에서는 열정적인 반응이 없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간다 사람들은 내가 뭘 배운다고 하는 열정도 강하고 내가 어떻게 이걸 배우면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그렇게 따라오니까 저도 가르치는 데 힘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지내고 진짜 물티슈 한 장 아껴 쓰고 전기 내가 몇 와트 썼는지 체크하고 전기 있으면 틈틈이 후레쉬 충전하고 그런 삶을 사는데 한국은 정전을 경험해 볼 일이 거의 없잖아요. 정전이 되었을때 불이 들어와서 정말 감사하단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진짜 가진 게 많아서 행복한 게 아니라 없어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안의 가치관들이 많이 바뀐 거 같아요. 내 마음이 저기 위에 있으면은 옆에서 누가 라면 먹을래? 해도 뭐야 나 배불러 입맛 없어 이랬을 텐데 환경이 풍족하지 않다 보니까 제 마음도 쭉쭉 내려가게 되었어요. 누가 라면 먹자고 하면 저는 좋다고 얘기하고 별거 아닌 사람들의 호의 하나가 행복이 되더라고요. 현지인 친구들이 없는 돈을 쪼개서 저한테 한국 간다고 팔찌를 선물로 줬는데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마음 하나하나가 우간다를 잊을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요.

Q6. 코로나 19로 인해 봉사활동에 많은 변수가 있었나요?

A. 제가 출국한 지 한 달 만에 우간다가 락다운으로 국경을 닫아버렸어요. 사실 아프리카는 방역이 한번 뚫리면 우리보다 의료체계가 훨씬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게 되게 치명적이거든요. 락다운을 해서 학교, 관공서, 상점, 심지어 이민국도 다 닫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희 이전에는 활동도 활발했는데 실제로 저희 선배 언니들과 이야기해보면 2주에 한 번씩 우간다 지방에 내려가서 봉사 활동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그렇게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락다운이 걸리니까 손발이 묶여서 숙소에만 계속 머무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온라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었어요. 온라인으로 청소년 캠프 열고 음악 캠프 열고 조금 풀렸었을 때는 청소년 캠프, 클린 캠페인 열고 활동을 했어요. 저는 미술치료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고 고등학교도 인문계 나왔고 가니까 일단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고 온라인이다 보니 영상도 만들어야 하고 프로그램부터 기획 예산까지 다 저희가 해야 했었어요.
처음에는 사실 나는 진짜 몸치고 나는 진짜 잘못해 미술치료학과 대학생인데 이런 생각에 제가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니까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제가 편집한 영상이 우간다 국영방송사에도 나오고 그다음에 통역도 제가 통번역도 하게 되고 우간다에 있는 국립대학교와 MOU를 맺어서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짰어야 했는데 번역작업도 같이 해보고 같이 강연도 준비하면서 저라는 사람에 대한 자신감이 되게 많이 높아졌어요.
저는 우간다에 다녀오고 나서 다양한 활동에 지원도 해보고 안돼도 해보자는 마인드가 생겼어요. 코로나가 반년 정도 그렇게 있다가 9월쯤 코로나가 풀리면서 대통령이 경제가 돌아가야 하니까 완화를 했어요. 우간다는 한국보다 와이파이 보급률이 정말 낮아요. 한국 같은 속도는 생각할 수 없고 데이터를 기가 단위로 끊어서 사야 해요. 그만큼 엄청나게 데이터 통신도 느린데 지방에 가서 애들한테 청소년 캠프하고 전화도 안 터지는데 서로 의사소통해가면서 하니까 그게 더 오히려 기억에 남더라고요. 나는 한국에서 왔고 자원봉사자고 나는 오늘 너희와 함께 손 씻기도 같이하고 클린 캠페인도 같이 할 거 다 하니까 거기 학교 교장 선생님도 와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셨어요.
우간다가 수도는 그래도 괜찮아요. 약간 70년대 서울 같은 느낌인데 지방으로 갈수록 물도 진짜 유니세프에서 보는 대로 5킬로 걸어서 물 길어오고 그런 데가 아주 많아요. 지방으로 가서 도니까 수도보다는 삶의 질이 떨어지긴 하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다녀왔는데 3일째 저녁에 처음 물 자체를 처음 접했어요. 머리도 엉겨 붙고 잘 씻지도 못했는데 현지인 친구가 물을 구해줬어요. 도대체 어디서 물을 구해왔냐고 물으니까 10킬로 떨어진 곳에서 길러왔다고 하더라고요. 오르막길 올라갔다 내리막을 내려왔다가 엄청나게 고생해서 가져왔었어요. 우간다 친구들이 저희에게 너의 집인 것처럼 편안하게 지내라고 말을 했는데 저는 정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나네요.
드디어 씻고 아이들한테도 프로그램 알려주고 캠프를 진행했어요. 춤 가르쳐주고 애들 율동 가르쳐주고 핑크퐁 노래, 악보를 보는 방법 알려주고 한국어 회화도 알려주고 물자가 풍족하지 못하다 보니 준비물이 크게 필요 없어도 되는 것들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어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한국어를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색다른 경험을 매우 즐거워했어요.

Q7. 비전학기를 통해 변화된 점이 궁금합니다.

A. 세상은 참 넓다.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아프리카에 다녀오기 이전의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면, 이제는 ‘우물을 벗어나고 있는 개구리’ 정도는 된 느낌? 또 이제 고생한 이야기만 하면 그러니까. 나일강도 다녀오고 래프팅도 했어요. 사파리도 다녀오고 우간다에 좋은 곳에 많이 다녀왔어요. 그렇게 관광도 하고 재밌게 다녀온 거 같아서 전 너무 행복했어요.
솔직히 1년이라는 시간을 다른 친구들은 자격증도 준비하고 그럴 텐데 1년의 세월 뒤에 혹시나 다른 친구들과 차이가 나면 내 로망에 빠져 괜한 걸 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면 어쩌나,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제 제가 또 아프리카 가서 그런 경험들 해 보겠어요. 1년 동안 젤 중요한 행복한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도와주는 곳에서 오는 안정감과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아요.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저 자체로도 성장하고 깡다구가 세지기도 했고 진짜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거 같아요.
세상에는 이런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저런 일들 속에서도 진짜 보면 너무 사람들이 놀랐거든요. 사실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봉사활동 간다니까 ‘거기를 왜 가?’ 이랬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에 좀 더 선진화된 지식이나 그런 것도 이 사람들에게 돕고 이 사람들한테 나도 얻어가는 게 많고 그런 걸 보니까 사람이 정말 진짜 배포가 커진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1년 동안 그 사람들한테는 필요한 사람이었던 거고 되게 좋더라고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날 좋아해 주고 그런 걸 보니까 그냥 그 순수한 마음들이 너무 좋고 잊을 수가 없는 거 같아요. 아무리 한국에서 힘들게 지내더라도 그때만큼의 삶에서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것들을 그런 제 꿈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 작고 커다란 소망이지만 조금 더 대한민국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면 좋겠거든요. 일단 지금은 학생이니까 나중에는 병원이나 센터에 취직해서 해야지 이런 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래 나는 만들 거고 나로 인해서 그렇게 될 거야 확신도 생기고 job이 아닌 doing을 찾았어요. 옛날에보다 꿈의 스케일이 더 커진 거 같아요.

Q8. 비전학기를 준비하거나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A. 주저하고 있는 것들에 있어서, 특히 그 이유가 학업 중단이나 그런 현실적인 목표와 관련된 거라면 학교의 지원도 받으면서 도전할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저는 세계체험 유형의 학생으로 다녀왔지만 여러 유형으로 신청할 수 있으니까, 세상은 넓더라고요.

 

“비전학기란?”

– 한 학기 동안 정규 교과목 이수(전공 및 교양) 없이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함으로 학점을 취득할 수 있는 제도
– 휴학 없이, 학교의 지원을 받으며 국제화 역량 강화, 전공실무 역량 강화, 전문성 및 인성 발현 등 자기개발과 미래 탐색 기회 실현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https://www.cha.ac.kr/행정/비전학기제도국내외신청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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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학생기자 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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